1. 베드로 이름의 뜻
(1) 베드로의 본명
베드로는 야고보,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3대 제자이자 수제자였는데, 본래 이름은 시몬이고, 요하나(히브리어)의 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이라고 부른 것은 요하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른 것인데,
"바"는 아람어로서 '~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요나는 '요하나'의 약칭입니다.
(2) 예수님이 바꾸어준 이름 베드로의 뜻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준다는 말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고, 그 이후 예수님은 시몬의 이름을 "게바"(아람어) 즉, "베드로"(헬라어)로 바꾸어 줍니다. 따라서 '시몬 베드로'라는 말은 본명과 예수님이 변경한 이름을 두번 나열한 것으로서 적절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 요한복음 1장 42절
게바 또는 베드로의 의미는 반석이라는 뜻으로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장 17-18절)
즉, 베드로의 위와 같은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 고백이 바로 교회의 기초가 되는 반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시 어부로 돌아가다.
(1) 반석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다?
위와 같이 예수님으로부터 "반석"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드로의 이름을 받았고, 실제로도 베드로는 그 누구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였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 사건을 제자들에게 알릴 때에도 베드로는 자신은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으며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리겠다고 장담하였고, 그것이 바로 당시 베드로가 믿고 있던 자신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태복음 26장 33절)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한복음 13장 37절)
하지만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 끌려가셨고, 베드로가 은밀하게 뒤따라 간 그 현장에서 사람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공범이라는 취지의 질문을 받게 되자, 자칫하면 자신도 잡혀서 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무서운 현실이 바로 눈 앞에 다가왔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두려움과 냉혹한 현실 앞에서 예수님을 무려 3번이나 부인하였는데, 특히 3번째 예수님을 부인할 때는 예수님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밖으로 뛰쳐나가 통곡하였으며 결국 심한 자책감으로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누가복음 22장 60절 ~ 62절)
(2) 반석인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사건은 그리스도인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정작 무섭고 냉혹한 현실과 두려움 앞에서는 예수님을 부인하여 예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의 의미와 상반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이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여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나 그 첫 사랑에 불타오르거나 새로운 사람이 된 감격으로 그 이후에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의 길을 걸어갈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 이후 수 없이 많이 넘어지고, 죄도 짓고 심지어 낙심하여 주저 앉게 되는 그와 같은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3.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을 만나 회복되어 레전드 그리스도인이 되다.
(1) 예수님을 부인하고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의 삶과 고민
베드로는 그 이후부터 다시 예전처럼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았지만, 아마도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건이 뇌리에 잊혀지지 않으며 하루에도 수십번도 넘게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어부로 평생을 살아왔음에도 그 시간들보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그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이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구나. 예수님께 모든 제자들이 다 부인해도 나는 부인하지 않고 죽음까지 따라가겠다고 한 그 고백도 거짓이 아니라 당시 진심이었고, 또 그렇게 믿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내 자신까지도 속였던 것이구나.
막상 무서운 현실이 닥치니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었고,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주님 옆에 있었기 때문에 불과했구나.
내 자신의 벌거벗은 비참한 모습을 깨달은 지금 주님 앞에 도저히 나갈 수 없고, 이렇게 물고기나 다시 잡아야 하는 몸이고, 또 그래야만 하는데, 왜 이렇게 예수님이 잊혀지지 않고 그 3년의 시간을 부인할 수도 없으며, 다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도 지울 수가 없는 것일까.
다시 할 수 있을까? 아니야.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라 동일한 현실이 닥치면 다시 예수님 부인할거야. 차라리 이렇게 사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그런데 또 이렇게는 살 수 없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2) 디베리아 바다가에서 다시 만난 주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디베리아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한 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내리라고 하셨고, 그대로 따르자 물고기 153마리가 잡혀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위 장면을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나요? 맞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바로 그 만남이었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 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 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누가복음 5장 4절 ~ 11절 중)
베드로는 그 전부터 예수님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초월한 불가능한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면서 그제서야 예수님이 바로 신적인 권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진심으로 엎드러 졌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라고 콜링하였고, 베드로는 그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좇았고, 바로 그 순간이 베드로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여정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처음 만나 뜨겁게 살아가다가 자신의 참된 모습과 비참함을 깨닫고 주저앉거나 낙심한 베드로를 주님은 처음 콜링한 모습과 동일한 모습으로 찾아오셔서 다시 진실하게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사도요한이 외쳤습니다.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그 외침을 듣고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바다로 뛰어 들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에 처음 응답하여 모든 것을 버려두던 그 때처럼요.
(3) 베드로의 회복
예수님은 모닥불에서 베드로를 기다리고 계셨고, 베드로에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과 동일하게 3번 질문하였고, 베드로는 답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사랑하느냐"
-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원어로 보면, 예수님은 2번째까지 베드로에게 네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는지 물었고, 베드로는 2번 모두 필레아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라고 답변하였으며, 마지막 예수님은 필레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지 묻자, 베드로는 그렇다고 답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질문 앞에, 자신의 생각이나 확신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적인 답변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정직하게 고백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베드로는 예전에 이 세상 누구보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버려도 자신은 끝까지 따라갈 것이고, 예수님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정도로 사랑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과 현실이 닥치게 되자,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였고, 자신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정도와 실체를 그때서야 적나라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베드로의 가슴과 영혼에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이 역시 도저히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실패의 경험으로 인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우정 정도로 사랑한다고 답변하였고, 주님께서 자신의 이런 모습을 전부 아신다고 대답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그런 고백을 책망하거나 실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고 기름부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회복되었고, 자신의 정직한 실체와 주님에 대한 사랑의 수준을 인식한 바로 그 지점부터 다시 시작하였으며, 진정한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방향과 목표를 알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전승에 의하면, 박해가 무척 심한 상황에서 어느 성도가 배반하여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위험에 빠지게 되었고, 배반한 그 성도가 베드로 앞에 잡혀 와 살기 등등한 성도들이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대체 이 자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
베드로는 "용서하자"고 대답하였고, 성도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용서할 수 있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자신은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한 죄인 중 죄인이었는데, 주님께서 그런 자신을 용서하시고 이 자리까지 이끄셨고, 자기 역시 그 용서와 사랑을 흘려보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사랑과 용서의 원천은 바로 디베리아 바다가에서 예수님과 만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용서와 사랑의 경험에서 비롯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제일 마지막 장에 위와 같은 메시지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기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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